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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찬 새보령보령소개
면적 | 가구 | 인구 | 행정구역 | 산업구조 | 직원현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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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4㎢ (보령시의 6.3%) | 2,537 | 5,332 | 6개 법정리, 19개 행정리, 66개반 | 농업 70%, 어업 7%, 기타 23% | 정원 21명, 현원 18명 |
토정 이지함묘로 불려지는 보령시 주교면 고정리 묘역에는 그의 형제와 존비속 14기 묘가 위치하고 있는데, 선생의 학문과 기이한 일화로 인하여 명당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인근에 이지함이 넘어다녔다는 지함재가 있다.
선생은 조선중기 학자로 천문 지리 의약 등이 능통하였으며, ‘토정비결’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평생을 방랑하다가 선조6년 56세에 도덕과 학문이 뛰어난 선비로 추천되어 포천현감이 되어서 백성의 가난해결을 위해 많이 노력하였다. 아산현감이 되어서는 걸인청을 지어 빈민구제에 힘쓰다가 1578년(선조11년) 사망하였다.
이지함은 한 곳에 얽매이거나 구속되는 싫어했다. “사람들은 안으로는 똑똑하고 강하기를, 밖으로는 귀하기를 바란다. 벼슬하지 않는 것보다 귀한 것이 없고, 욕심내지 않는 것보다 부유한 것이 없으며, 다투지 않는 것보다 강한 것은 없고, 알지 못하는 것보다 똑똑한 것은 없다. 알지 못하면서 똑똑하고, 다투지 않으면서 강하고, 욕심내지 않으면서 부유하고, 벼슬하지 않으면서 존귀한 것은 실로 대인만이 할 수 있다.” 고 남긴 대인설에 걸맞는 삶을 살다 떠났다.
난파된 배가 나르던 고려청자가 발견된 곳으로 죽도에서 서남쪽으로 약 1.5㎞ 떨어진 해역 약 7.07k㎡이다. 문화재보호법에 의하여 유물매장해역이 사적으로 지정된 것은 81년에 신안앞바다의 '송원대유물매장해역(宋元代遺物埋葬海域)'이 지정된 후로 이곳이 두번째이다.
1983년경부터 도굴이 있었고, 84 ~ 85년에 응급적 탐색작업을 하였고, 87년 집중적인 수중고고학 발굴 작업을 통해 상감청자 32점을 비롯해 많은 유물을 건졌다. 이곳에서 나온 청자류들은 약 100여 점에 이르며, 그 동안에 도굴된 유물을 합하면 그 수량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추산할 수 있다.
전남 강진군 대구면이나 전북 부안군 보안면의 가마터에서 제작되어 배로 운반하던 도중 이 부근에서 배가 난파된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인양된 청자류는 84 ~ 85년에 이미 발견되어 국립중앙박물관과 공주 · 부여박물관에 보관 전시 중인 100여 점이 따로 있다. 그 중 ‘기사(己巳)’라는 글씨가 새겨진 것이 있어 청자의 연대를 밝히는데 큰 도움을 주는데, 기사년을 1269년으로 보는 설과 1329년으로 보는 설이 있다.